그렇다면 우리가 경건에 있어 일관된 초자연주의라는 이름으로 칼뱅주의를 말해보자. 칼뱅주의의 핵심 사실은 하나님에 관한 통찰이다. 칼뱅주의를 결정하는 원리는 하나님 영광을 위한 열정이며, 우리가 삶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그분께 돌려드리도록 한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권리에서 시작해서 이것에 집중하고 이것으로 끝난다.
즉 우리가 칼뱅주의란 유신론이 그 권리를 보장받은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바의 직접적인 결과에 기인한 것을 의미한다. 즉 칼뱅주의는 그 개념의 정점에 경건을 두는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 안에서 활동하고 하나님 안에서 존재함을 의식한다. 즉 우리가 순전한 형태의 칼뱅주의가 개신교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에 전적으로 내어놓는다. 칼뱅주의자가 세상이라는 거울을 응시할 때 그 세상이 자연의 세상이든 사건의 세상이든 그의 관심은 (학문 연구가 매우 분주하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교한 구성인) 거울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거울에 반영된 하나님의 얼굴에 있다. 칼뱅주의자는 경건한 삶에 대하여 숙고할 때 (종교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숭배자들이 아무 소득 없이 몰두하는) 영혼에 밀려드는 감정들의 심리적인 본성이나 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그 감정들이 나오는 신적 기원과 그 감정들이 목표로 하는 신적 대상에 더 큰 관심을 지닌다. 칼뱅주의자는 영혼의 상태를 숙고하고 영혼이 죽음과 죄로부터 구원받을 가능성을 숙고한다. 이때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반응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응들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념하여 그가 선과 하나님께로 회복되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전능한 사역을 바라본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칼뱅주의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통찰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눈이 자연 속의 하나님과 역사 속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한 순간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발걸음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이 일하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는 사유의 세계에서 초자연주의자다. 그에게는 이 세계도 초자연적인 산물이다. 초자연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시간 이전이라는 먼 과거 어느 곳에서 이 세계를 만드셨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모든 사건 속에서 이 세계를 만들어 가시는 중이라는 의미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일어나는 변화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 모든 일어나는 일에는 하나님의 "증대하는 한 가지 목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은 자신의 창조자를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우너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모든 단계와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초자연적인 사역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고안 되었고, 하나님의 독생자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삶과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고, 하나님의 성령은 동정녀 잉태나 죽음에서의 부활과 같은 연속된 초자연적 행위로 구원을 적용하신다. 따라서 칼뱅주의자에게 있어서 교회는 첫 번째 장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이다. 칼뱅주의자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삶은 이 초자연주의에 담겨 있다. 이것이 없다면 칼뱅주의도 있을 수 없다. 칼뱅주의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결코 초자연주의적이지 않다. 이 시대는 초자연주의에 대해 명백하게 적대적이다. 이 시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생각과 감정에 깊이 박혀 있고 넓게 퍼져 있는 이성주의다. 우리는 근대 자연주의의 기원을 안다. 우리는 그 역사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근대 자연주의가 17세기 후반에 시작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에는 몰두하면서도 하나님의 권리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근대 자연주의는 좀 더 전개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열매를 낳았다. 영국의 이신론과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독일의 계몽주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근대 자연주의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신(新)개신교사상을 사칭하여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근대 자연주의는 루터와 그의 모든 열정적인 방법을 거부하고, 그 영적 유산의 기원을 찾기 위해 에라스무스의 종교 평등주의로 눈을 돌린다. 근대 자연주의는 모든 유형의 사상과 삶의 모든 행동양식에 침투했다. 근대 자연주의는 (모든 "있음"을 "되어감"으로 소거시키는) 자연주의적 철학과 (우주에게서 설계라는 개념을 없애려는 데 한 마음으로 집착하는) 자연주의적 과학, (그 첫 번째 열매는 프랑스 혁명이었지만 그 마지막 열매는 무신론적 사회주의가 될 법한) 자연주의적 정치, (인간의 인격성을 위한 자리를 사건의 원인들 사이에서 거의 찾지 못하는) 자연주의적 역사, (하나님이 있는지, 만일 있다면 그 하나님은 인격적인지, 만일 인격적이라면 인간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가지려고 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방해가 된다면 하나님에게 '손 떼!'라고 말하는) 자연주의적 종교를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는 복음의 사역자로서 우리의 소명을 수행하는 가운데 근대 사상의 이 자연주의 때문에 큰 방해를 겪어왔다. 우리가 은혜의 메시지를 전달한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연주의적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을까? 우리의 지인들 중에서 이 세계가 발전하는 요인으로 하나님을 상정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의 사건 진행이 "자연적인" 과정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곤 하는가? 심지어 구원 역사에 관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신학이라는 영역에서조차 새로운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이 우리에게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람만이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경으로 우리에게 강제로 떠안겨졌다. 그 성경은 자연적인 발전이라는 원리에 따라 재구성된 새로운 성경이었다. 하나의 성경을 이루는 각각의 책들은 그것들의 "자연적인" 순서를 찾고 그 책이 기록으로 보존하는 종교의 "자연적인" 발전 과정을 찾으려는 압도적인 충동에 따라 갈기갈기 찢겨서 재배열되었다. 자연주의란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성경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동일한 자연주의 노선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자조차도 재구성했다. 한 세기 반이라는 시간에 걸쳐-헤르만 라이마루스1로부터 윌리엄 브레데2에 이르기까지-학문이 크게 발전했던 시대의 모든 해결책은 "자연인" 예수3를 제시하려는 작업에 크게 집중했다. 여기에서 왜 구약과 신약의 기적들에 대해 말하는가? 그들이 진정 의문을 품었던 것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유일한 기적이다. 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논하는가? 그들이 그 시대의 평범한 한 사람 정도로 (혹은 아마도 그 당시 다른 갈릴리 백성들과는 다르게 비일상적인 생생한 종교적 체험 정도로) 축소시키려 했던 분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자연주의적 착란이 공격하는 예수다. 그 작업은 극단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시대가 끝나갈 무렵 우리 앞에 실제로 주어진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던 예수가 아니면 편집증 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광적인 예수 둘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초자연주의를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순전한 초자연주의를 말하는 칼뱅주의적 고백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즉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선한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욕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무능력한 영혼을 구원으로 데려가신다는 확신이 흔들린다. 이러한 현상이 이상한가? 또한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가서 잘 닦인 넓은 길로 여행하는 것이 이상한가? 칼뱅주의자의 문은 좁아서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고, 칼뱅주의자의 길은 너무나 고생길이어서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는 것이 이상한가?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해두자. 칼뱅주의는 바로 기독교다. 칼뱅주의가 지지하는 초자연주의는 바로 기독교의 숨결이다. 기독교는 초자연주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초자연주의의 어떤 측면을 받아들일 것인지(예를 들어 기독교의 기원으로서의 초자연주의를 견지하는 것으로서) 취사선택하거나, 또는 칼뱅주의와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독교적 적용으로서의 초자연주의를 배제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종교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초자연적인 장관과 외형을 띠고 이 세상에 도입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것들은 함께 유지되거나 함께 무너진다.
초자연적 구속자는 자연적 구원을 위해 필요한 분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구원하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의 영광의 구름을 나부끼며 이 땅에 내려오셔야만 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상한 일이다. 소키누스파 신학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인간 그리스도와 자력 구원의 종교가 있다. 오늘날도 동일한 논리가 작용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초자연적 구원과 관련해서만 진정한 초자연적 구속과 진정한 초자연적 구속자를 필요로 하거나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칼뱅주의가 오늘날의 논쟁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칼뱅주의가 미래를 위해 기독교를 보존하려는 섬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직 칼뱅주의자만이 세상을 위해서 초자연적인 종교를 보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사실이며, 기적은 초자연적 활동이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초자연적 사역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적 행위가 초자연적 구속이며, 하나님이신 성령의 신적 사역이 초자연적 구원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체계를 이룬다. 우리가 이 중 하나를 빼내면 다른 것을 흔들어 놓는 결과를 낳는다. 칼뱅주의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으로서의 초자연주의다. 즉 우리는 그 효력을 통해서 구속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된다. 오직 구원에 관한 초자연주의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만이 우리를 향해 마치 승리라도 한 듯이 의기양양해하는 반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의 공격을 만났을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감추어라. 여기서 성의가 없는 모든 도식들과 낯 뜨거운 구성들의 길에 반대해서 거짓들을 물리쳐라. 유니온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헨리 보인튼 스미스(Henry Boynton Smith, 1815-1877)가 강력하게 선포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불신앙은 철저한 기독교 정통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싸움은 완고하고도 철저한 정통주의와 완고하고도 철저한 불신앙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싸움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콩트 사이에서, 아타나시우스와 헤겔 사이에서, 루터와 쇼펜하우어 사이에서, 스튜어트 밀과 장 칼뱅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 증언은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일부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채우면서 그것의 본질을 자연적인 것으로 채울 수는 없다. 우리는 역사의 오래된 사실들에 관해서는 초자연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에 관해서는 자연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생했던 일들에 관해서는 초자연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정작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자연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기독교 초자연주의는 어떤 형태든지 초자연적인 구원과 함께 가지 않고는 우리의 삶과 생각에서 궁극적인 것으로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구원에 관해 일관되는 초자연주의는 칼뱅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칼뱅주의가 바로 이 땅의 소망이다.
벤저민 B.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887년부터 1921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