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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lom aleikhem !

שָׁלוֹם עֲלֵיכֶ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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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5-06 19:14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율동 및 드라마 사용 문제에 관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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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창암
조회 : 221  

생각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깊은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많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한편으로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요소들도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계신 모든 증거를 인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주님의 임재하심이 능력과 은혜로서 영광 가운데 확증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들 주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충분히 증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도 더 우리의 예배와 삶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설교를 잘 듣고 회심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대도시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혀 감동을 받지 않으며 우리의 메시지에 의하여 움직이지도 않는다. 일반 사람들이 우리의 복음에 관한 진리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를 그들이 과연 알고 있는가?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고개를 쳐들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 글의 제목에서 문제 삼고 있는 논제들을 말함에 있어서 조차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점과 실수투성이의 사람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달라는 열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진리의 영광스러움과 능력은 영적인 오류들과 영적 혼동을 바로 잡아 주는 큰 잣대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고 또 우리가 올바른 예배와 전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 교회들이 예배와 전도의 혁신을 추구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우리가 다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춤과 드라마 사용

일부 독자들은 왜 우리가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춤과 연극 사용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사실 일부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이 문제는 특별히 대학 캠퍼스 활동을 하는 자들이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단체나 교회 활동에서 폭넓게 애용되고 있다. 거리 공간에서 연극을 연출하는 것은 전도에 큰 효과를 가져 온다고 믿기 때문에 드라마 사용이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다. (더욱이 기독교 문화 창달이라는 명목 하에 마치 드라마나 춤을 가진고 복음의 진리를 표출하는 것만이 참다운 기독교 문화인 것처럼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예술인들과 연예인들의 활동을 인원 동원 및 교세 확장 차원에서 크게 권장해 온 것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 파고 들어온 것이다-역자주) 자유주의 교회들은 오랫동안 기독교 연극이나 예술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문제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은 복음주의 또는 보수주의 교회들조차도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현대적인 율동이나 드라마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일을 권장한 학자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국 성공회 신학교 교수로서 그는 「춤추며 여호와를 찬양하라」(Praise Him in the Dance)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그 책의 서문에서 '위대한 연인은 위대한 댄서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율동 사용 문제를 크게 부각시켰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참된 예배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개신교 외에 다른 종파에서는 드라마 사용이 이미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R.C.D.Jasper는 '1948년에 Ronald Knox가 「The Mass in Slow Motion」이라는 책에서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미사에 일종의 댄스가 사용되는 것은 관객인 회중들에게 하나의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표출하는 것이다'라고 오래 전에 말했음을 기록하였다. 그는 예배가 말씀뿐만이 아니라 몸동작 언어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 교회는 그리스교회의 영적 생활과 흡사하다. 이 교회의 예전은 심지어 교회 내부 장식까지도 그리스 드라마와의 연계성을 무심코 들어내고 있다. 실로아주 경건한 러시아 정교회 작가 중 한 사람은 그들의 예전을 주저없이 "구원의 드라마"로 말하고 있다‥‥‥이것이 동방 교회의 경건이다. 동방 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무대"(theatron pneumatikon)이다.' 천주교에서 용납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제 개신교, 특히 일부 보수주의 교회서조차도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에 있어서 예배와 전도 집회의 핵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선포였다. 이것은 개신교의 영광이요 힘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현상적인 흐름이 함축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믿는다. 하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전통적인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는 예배의 중심을 언제나 하나님말씀 선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나 율동 사용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본 이슈들을 수용하고 있는 자들은 이성주의자들이다.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합리화시켰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들 앞에서 어떤 경외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들은 어떤 것으로도 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비밀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형태 안에서, 화상이나 조각물에 나타난 것들을 안에서, 사제들의 화려한 성의 착용에서, 찬양대와 사제들의 아름다운 찬양에서, 제단에서 휘날리는 향연에서, 사제가 붙들고 있는 십자가 안에서 오직 오감을 통하여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입 맞추는 것에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실은 J.G.Davis가 쓴 「예배와 율동」(Worship and Dance)이란 책의 서론에 실린 내용이다. 그는 이 서론에서 그의 책 마지막 부분을 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쉬바(Shiva)신을 나타라야(Nataraja), 즉 춤의 신으로 묘사하고 있는 글을 기록하였다. 이 서론에서 우리는 시드니 카터로부터 시작하여 춤의 신인 쉬바신에게까지 우주에 있는 모든 동작의 출처로서 그의 리드믹한 춤의 전 영역을 다 다루었다.' 이같은 기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3. 율동과 드라마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같은 급진적인 흐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어떤 것도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신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특징짓는 춤이나 뮤지컬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어쩌면 구약 성경에서 그같은 사실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의 사례가 있다면 거기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 부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주요한 증거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 역사이다. '신약 시대 이후 4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에서 춤이나 드라마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면 일부 교회가 이같은 행위를 사용했는데 이것조차도 어거스틴은 이교도의 풍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는 글을 기록하였다‥‥중세기에 오면 중세 교회는 기적과 신비성을 추구하는 열정이 아주 컸는데 이때 연극 사용이 대단히 대중화를 이루었다. ' 우리는 이 주장을 심도 있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중세 교회가 음악이나 드라마 사용 문제에 대하여 아주 우호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도 사용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활동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다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오히려 그같은 무대 활용에 대한 반대가 아주 컸다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제2세기에 타티안은 '배우를 가르쳐서 내적으로는 자신을 보이지만 외적으로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꾸미는 자'로 말하였다. 한편으로 터툴리안은 그가 쓴 De Spectaculis에서 '진리의 저자께서는 모든 거짓을 싫어하신다. 성령은 사실이 아닌 모든 것을 불의한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위선을 성령께서는 정죄하시며 어떤 가식적인 음성이나 성(性)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옳은 것으로 인정하시지 않으신다. 또 꾸며낸 사랑이나 진노, 슬픔과 눈물을 옳게 여기지 않으신다'라고 하였다. 터툴리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로부터 시작하여 내려온 금지 사항중 하나는 교인들이 무대와 관련된 그 어떤 것과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연극 공연이 대중적인 것이었는데 그 안에는 많은 익살과 외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연극이나 유회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성결케 하고 의로 교육받기를 원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보는 이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호기심을 잡아끄는 용도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하여 가장 심도 있게 다룬 분은 Historiomastix(1632)를 쓰신 William Prynne이다. 이 책은 분략이 천 여쪽이나 되는데 악마가 모든 연극 무대의 저자라는 전제로 시작하고 있다. 프린씨는 분명 가혹할 정도로 극단적인 논쟁자로서 우리는 그의 비판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저작의 기념비적인 특성은 그의 주장을 논박하는 반대자들조차도 인정하였다. 프린의 칼빈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라우드 대주교(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을 핍박한 성공회 대주교 임-역자 주)는 '그 책을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도 60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Prynne은 무대공연을 반박하는 엄청난 분량의 글을 출판하였다. '성 키프리안이 성경은 모든 종류의 호화로운 구경거리와 무대 공연을 영원히 정죄한다고 결말지었다. 왜냐하면 대 부분이 우상을 섬기는 행위들이 공연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공연들은 모두 다 공허한 것들이요 추잡한 것을 들어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터툴리안이나 락탄티우스, 예루살렘의 씨릴 및 크리쏘스톰 등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 그는 시편 119:37의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는 말씀을 무대 공연을 반대하는 근거로 주장한 힐러리나 암브로스를 언급하였다. 그의 글을 통하여 두 군데만 더 인용해 보자. 먼저 '터틀리안은 그의 책 De Spectaculis에서 이교도들이 예수 믿는 신앙인이 되면 그들이 즐겨했던 모든 연극 공연을 내 던졌다'고 주장하였다. 또 하나의 글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무대 공연과 유회, 율동들 및 스포츠 활동과 호화스러운 구경거리들을 악마의 작품이요 악마의 허식으로 간주하고 다 포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흐름에 대하여 교회사적으로 입증해 보려고 한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초기 교회들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그 부분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롱 여사의 주장, 즉 '신약 시대 이후 4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율동이나 드라마 사용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분명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 말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이와 같은 활동들에 대하여 뿌리깊은 적대감을 교회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주장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기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사이에는 약간의 다른 견해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존 베일은 연극에 대하여 강한 칼빈주의적인 입장에서 홍보하는 글을 썼다(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Article on Drama 참고). 더욱이 「튜더 프리탄니즘」을 쓴 나펜(Knappen) 교수에 따르면,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경적 드라마 연출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칼빈이 어디에서 했는지를 나펜교수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청교도들이 모이는 처소에서 종종 연극이나 가면극을 공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저자는 '베자 역시 개신교도를 위하여 미스테리한 연극 대본을 썼다'고 주장하였다(「옥스퍼드 교회사 사전」에서 드라마 부분을 참고). 심지어 Prynne도 '옛 종교개혁 시대의 연극이나 추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시인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시대에 무대 공연은 개신교 사상을 대중들에게 더 빨리 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Histriomastix).'

지금까지 생각한 것은 주로 반대 입장을 다룬 것이다. 1581년에 Stubbs는 그의 책 The Anatomy of Abuses의 서문에서 '몇몇의 연극과 비극 및 토막극들은 아주 진실하고 추천할 만한 놀이'로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도 수정 증보판에서는 빼 버렸다(Tudor Puritanism, M.Knappen). 1599년에는 레이놀즈의 「Overthrow of Stage Plays가 출판되는데 이 책에 레이놀즈는 '외설적인 것이나 상스러운 말, 경솔한 행동, 술 취함 또는 어떤 잘못된 행동들을 본받거나 모방한다는 것은 분명히 합당치 못한 행동들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 주제에 대한 조오지 휫필드 목사의 견해가 어떠했는지를 보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휫필드 목사는 말하기를 '내가 학창시절에 희곡들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하여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서 그 대본에 나오는 역할들을 연습하곤 하였다. 교장 선생님은 내 자신이나 친구들이 얼마나 열심인지를 보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어떤 역할까지도 맡아 주셨다. 그리고 나보고 여학생 복장을 입도록 하셨으며 함께 공연하기 전에 내 역할을 열심히 연습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종종 나를 당황케 하였지만 나는 그 같은 일을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고 싶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종합해 보자. 일반적으로 드라마 사용에 대한 반대 의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 교회 밖에서도 용납되지 않은 것을 교회의 예배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은 드라마틱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천주교나 전통적인 교회 예전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대체로 예배가 영적이요 성령의 역사 가운데 신약 성경에 어떤 형태의 춤이나 드라마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는 개혁 교회들에서는 드라마 사용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가 있음을 보아 왔다. 더 나아가 일부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가운데는 비록 그들이 가진 태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드라마 사용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근거는 성경이다. 이제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것들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는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그이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행 6:15). 영적 기쁨은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부흥과 연계되어 나타난 열정적인 찬양은 이 같은 진리의 또 다른 현상이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고침을 받고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행3:8). 우리는 술주정뱅이요, 깡통제조업자인 빌리 브레이(Bray)가 하나님 앞에서 그 많은 청중들을 하나의 거대한 형상으로 녹아내린 듯한 겸허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 설교사역을 읽을 수 있다. 모인 회중들은 큰 죄책감에 사로 잡혔고, 고통 하는 영혼들이 무아지경으로 빠지는 듯한 모습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마치 "성령의 술에 취한 자들"로 불려졌다. 어부들의 대다수는 황홀한 "춤"을 추었는데 이 같은 모든 현상들은 비록 육체적이고 신비학적인 흥분이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 생애를 통하여 영적 변화로 이어졌다(영국판 진리의 깃발, 1978년 3월호,Reminiscences of the 1859 Revival). 그러나 부흥과 관련하여 나타난 이러한 현상들은 앞에서 언급된 율동이나 드라마 사용 문제와는 거의 관련지을 수 없는 것들이다.

Rev. John Marshall / 서창원 역 (진리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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