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많은 지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손만 뻗으면 수많은 신학자료와 강의와 책들을 접할 수 있다. 과거 교부들이 평생 모으기 어려웠던 자료들을 이제는 단 몇 초 만에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은 많아졌는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한다고 말하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대신 하나님을 설명하려 하고, 신학을 한다고 말하지만 어느새 하나님을 경배하기보다 하나님을 분석하려는 자리에 서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욥기서를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욥기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책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설명하려 했다. 왜 의인이 고난받는가?,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악인이 형통하는가? 를 인간의 논리와 경험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의 말은 진리가 풍성하며 거의 틀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상당 부분은 교리적으로 옳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이해 속에 가두려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기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려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38장),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다. 대신 창조 세계를 보여 주셨다.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느냐?”, “네가 바다의 근원을 다녀보았느냐?”, “네가 리워야단을 낚시로 끌어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위대한 창조 세계를 보여 주심으로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셨다.
특히 욥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인간의 무능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을 단순히 하마나 악어 정도로 축소시키는 것은 본문의 장엄함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들을 통해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인간은 자연 하나도 완전히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자기 이성 안에 가두려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 연구와 신학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칼빈은 유한한 인간은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우리는 참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구 대상 이전에 경배의 대상이시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렸으며, 사도 요한도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죽은 자같이 되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떨게 만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단정한다.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자기 신학 체계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 한다. 신학은 점점 경외를 잃어버리고 논쟁과 우월감의 도구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고 제한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도 배워야 하고, 지금도 틀릴 수 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참된 신학은 인간을 높이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낮추는 학문이어야 한다. 성경 연구의 목적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경외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사람은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깨닫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크시고 우리는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욥은 마지막에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서 만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6)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존재의 무너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욥은 침묵하며 회개한다.
결국 성경 연구와 신학의 마지막 목적은 설명이 아니라 경외이다. 참된 신학은 인간을 논쟁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만든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지식은 위험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경외하게 만드는 지식은 복되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아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배우는 자들이며, 여전히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며 서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수록 더욱 겸손해야 하며, 신학을 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길이며, 하나님 앞에 선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다.
발체: 임진남목사 (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