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인 효력을 발생시킨다.
칼빈은 목사에게는 두 가지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이라는 것이다.”(디도서 주석)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 한 것이다.
“성경은 목자에게 양떼를 모으고, 또 도적떼와 늑대를 쫓기 위한 두 목소리를 제공한다.” 는 칼빈의 주장은 그의 성경권위에 대한 믿음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갖고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면전에서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교리의 대적자나 복음을 듣고도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금수와 같이 되어 모든 이성을 상실하는 자들을 보거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당신의 말씀을 높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위대함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대해 모독하는 자들을 악마에게 내어 주시어 그의 지배를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거나 망령되이 대하거나, 위장하거나, 속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말씀을 제공하여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만큼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반역자들은 마치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그(하나님)의 이름을 경거망동하게 모욕하는 그들의 입을 막지 않고 있음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해 겸손하게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 그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르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부르고 계시는데 그들은 오기를 거절하는 커다란 배은망덕 때문에 죄 값을 치르게 되어있다”는 말을 통해 볼 때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확실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행하려는 자신들 속에 존재하는 본성을 교화시키도록 스스로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이 권능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속에서도 악을 죽이고 굴복시키며 쫓아 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은 모든 조소를 기록할 자를 두셨다... 우리의 교훈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으니,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함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자. 그는 천사의 왕으로 천사도 그에게 복종하니까” 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웠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진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들고 강해하며 설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의 청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 설교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셈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반항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형벌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면 하나님의 은밀하신 능력에 이끌림을 받은 피 선택 자들은 성령이 말씀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 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사야 주석 55:11).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과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선포에 덧붙여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올 수 있는 비밀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심판의 부정적인 면은 “복음의 본성이 아닌 우발적인 것들” 이라고 덧붙인다. “복음의 본성을 떠난 인간의 과오로 부터 발생되는 것” 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책임은 없다. 또한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책임은 없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 있게 제시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 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저것 갖다 붙여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던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칼빈의 신념은 복음 선포의 이중적 효과를 아는 자로서의 고백인 것 같다. 그는 “타락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자칭 심장에 강철을 두르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웃음을 삼킨 채 냉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들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지 않으려하나 그들이 조소했던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는 마치 쇠사슬에 묶인 개들이 그곳에서 헤어나려고 물고 찢고 하는 격렬한 모습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칼빈의 설교관